영통사복원 이야기 -개성 영통사 복원, 첫 단추를 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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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28 09:20 조회1,898회 댓글0건본문
2년여에 걸쳐 실시된 발굴은 영통사 도량의 기본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마감된다.
당시 발굴에 참여한 조사팀은 북측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일본 다이쇼대학의 최고 연구진들이었는데, 이미 작고한 전 고고학연구소 소장 한인호, 실장 김종혁, 연구사 이창언을 비롯해, 일본 다이쇼대학의 사이또 다디시 명예교수, 불교연구소 소장대리 다다고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발굴조사의 완료는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3만여㎡나 달하는 방대한 면적의 도량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내는 일이 남았기 때문인데, 발굴 당시부터 영통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원형 복원작업에도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일단 필요했던 것은 복원사업을 원만히 이끌어나갈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었는데, 지도부의 전폭적인 관심 덕분인지 ‘영통사복원추진위원회’라는 명으로 만들어진 구성원들은 북을 대표할 만한 탄탄한 인력들로 짜여졌다.
차후 대한불교 천태종과도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게 되는 영통사복원추진위원회는 북측 최대의 종교단체인 조선불교도연맹과 우리의 문화재청과 같은 업무를 총괄하는 문화보존지도국, 그리고 조선경제협력위원회로 구성되었다.
특히 조선경제협력위원회는 언뜻 보아서는 영통사의 복원과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이는 단체이지만, 사실 북한 내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곳으로서, 수월하게 복원작업을 실시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영통사복원추진위원회에 조선경제협력위원회가 가담을 하게 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통사복원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알게 하는 일면이기도 했다.
영통사터 발굴조사가 시작되고 활발히 작업이 이뤄진 것은 1997년에서 1999년.
당시 우리는 IMF로 인해 큰 경제적 혼란을 겪을 때였다. 청년실업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가정이건 사회건 흔들리는 경제로 인해 견디고 조여 매야하는 어려움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1995년에서 1999년 사이 북한은 고난의 행군시대라 하여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었다. 곳곳에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그 상태가 심각했고, 이는 한민족인 우리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형국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IMF극복을 위해 긴축제정을 실시하고, 사회 전반에서 경기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처럼, 북측도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필요했다. 실질적인 구호사업에 눈을 돌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인민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민족 사업을 펼쳐내는 것도 고난을 극복하는 하나의 길이었다.
북측에게 미래 발전을 위해 새로운 거점이 될 수 있는 개성 영통사 복원.
완벽하게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복원에 대한 의지 또한 팽배했지만 문제는 역시 자금이었다. 영통사는 조그만 경당 몇 개로 구성된 작은 절이 아니었다. 그 규모만도 대단했고, 옛 고려가 자랑했던 영통사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려면 너무나 큰 경제적 요건이 갖춰져야 했는데, 거리에 아사자들이 속출하는 북한의 현실에선 바닥을 다지고, 벽을 세우고, 기와를 얹고 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고되고 힘겨운 고행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영통사의 복원 계획은 한 해를 넘기고 새 천년을 맞이하게 된다.
모든 이들이 그 동안의 시름을 걷어내고 새 시대 새로운 도약을 꿈꿨던 2000년.
그 어느 날 대한불교 천태종으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 갑작스런 전화 한통은 앞으로 5년 간 매우 질긴 인연의 서막이 된다.
당시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재일교포 최준씨였는데,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온 이야기는 다름 아닌 개성에 위치한 영통사에 관한 것이었다. 영통사는 한국 천태종을 개창하신 의천대각국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인데, 참으로 오랜만에 들려오는 영통사에 관한 소식에 천태종단은 기대와 긴장을 감싸 안게 된다.
전화 연락이 있은 며칠 후, 재일교포 최준과 김수식씨가 전운덕 총무원장스님이 계신 구인사로 직접 찾아왔다. 그들의 손엔 영통사 발굴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자료가 들려있었다.
영통사터 발굴 작업에 참여한 다이쇼대학은 일본 천태종과 깊은 관련이 있는 대학으로, 당시 일본 천태종 종무청의 미시요카 요코 총장이 전운덕 총무원장님께 이 자료들을 전달하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북한의 실정이 어려운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그런 와중에도 천태종의 성지나 다름없는 개성 영통사를 복원하려 든다는 것은 고마우면서도 천태종에서 쉽게 관심을 져버릴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영통사터 첫방문>
그러나 복원지원에 대한 연락조차 북측과 직접적으로 하지 못하고,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지원을 문서화 할 수는 없었다.
전운덕 총무원장님께서는 영통사의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만 진다면, 많은 신도들이 한국 천태종의 구심점이 되는 영통사를 성지 순례할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결과를 전제로, 복원지원을 구두로 합의하신다.
그리고 첫 단추로 남측 천태종단에서 개성 영통사터를 직접 방문하는 것을 제시하셨다.
한국 천태종의 옛 자취가 어떻게 남아있으며, 그 복원 현장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앞으로의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대한불교 천태종의 호의적인 관심에 북측도 쾌히 영통사터 방문을 찬성했고, 영통사로 향하는 첫 번째 발걸음은 2000년 새로운 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우선 천태종 내부에선 종단회의를 거쳐 영통사를 방문할 방북조사단이 꾸려지게 되는데, 박덕수 스님을 대표로하여 13명의 스님께서 현지답사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애국불교의 실천 일환으로 통일에 대한 많은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사실이나 직접적으로 개성 땅을 밟게 되는 날이 오다니, 무척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개성에 이르는 길은 길고도 험했다. 북측으로 직접 전화 한통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현실을 직시해 본다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영통사를 찾기 위해선 우선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에서 평양으로 그리고 다시 개성으로 이동해야했다.
서울과 개성은 눈대중으로 그 거리를 짐작해 봐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그러나 당시 천태종단은 제 3국을 통해서만 전화연락과 서신 교환이 가능했고, 걸어서라도 곧 도착할 수 있을 거리를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가르며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가까우면서도 너무나 먼 현실을 눈앞에 남겨 놓고 있었다.
당시 개성 영통사를 처음 찾아가는 길에 13명의 스님들께서는 앞으로 북측과 영통사 복원을 위해 어떠한 약속과 실행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나로 이어진 한반도 길을 남의 나라로 돌고 돌아가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신다.
하지만 첫 번째 방북은 어쩔 수 없이 북경을 거쳐 긴 여정을 하게 되고, 개성 땅에 도착한 13명의 방북조사단은 영통사터로 향하는 짧은 거리만 남겨놓고 큰 감회에 젖는다.
중생을 구제하고 이 땅에 천태종을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의천대각국사는 고려의 옛 땅, 지금 남에서 온 13명의 스님들이 서 있는 이곳을 수 백 번 오가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북측 간부들의 안내로 개성에서 차를 타고 영통사로 향하던 길. 북한 제 2의 도시인 개성은 시간의 흐름이 없는 도시 같았다. 개성시내 중심을 가르는 가장 넓은 신작로엔 자동차 한 대 오가지 않았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드물었다. 도시 전체를 감싸는 짙은 회색빛 건물 곳곳엔 붉은 외침이 그려져 있었고, 우리와 너무도 다른 모습들에 씁쓰레한 울렁임이 몰려왔다.
낯선 개성시내를 빠져나와 십분 남짓 달려가니 오관산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접어들었다. 뒤틀린 창자 모양으로 굽이친 길 옆으로 바다인지 호수인지 분간할 수 없는 드넓은 송도호가 펼쳐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송도호의 절경에 영통사의 모습이 더욱 궁금해졌고, 굽이굽이 흐르던 비포장도로가 끝나갈 무렵, 스님들은 차에서 내려졌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남쪽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관산의 수려한 자태가 위풍당당하게 병풍을 치고 둘러서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고요하면서도 깊은 산세를 품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기품 있는 천태종의 성지 같았다.
다시 차를 타고 30여 분을 달리니, 드디어 영통사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폐사의 이유조차 알 수 없이 조용한 암흑기를 맞았던 영통사. 종단의 시작을 알렸던 유서의 장소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당시 현장을 찾았던 스님들에게 그 감회는 평생가도 잊을 수 없는 뜨거운 용광로 같았다.
하지만 양 발을 내딛고 있는 것이 송구할 정도로 안타까운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오관산을 보며 내던졌던 감탄사가 긴 한숨이 되어 되돌아왔다. 천태종단의 최대 성지라 할 수 있는 이곳이 앙상한 모습으로 스님들을 맞이했기 때문인데, 외로이 서있는 5층 석탑만이 이곳이 옛 고려 때 불법이 흘러넘쳤던 도량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과거 의천대각국사께서 부처님의 뜻을 이어받아 불심을 세상에 알린 이곳이 황량한 벌판으로 변하여 외롭게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이 불사를 복원하는 데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있어도 천태종단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의지가 다져졌다. 더 이상 이 고귀한 땅을 초라하게 방치해둘 순 없는 것이었다.
당시 발굴에 참여한 조사팀은 북측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일본 다이쇼대학의 최고 연구진들이었는데, 이미 작고한 전 고고학연구소 소장 한인호, 실장 김종혁, 연구사 이창언을 비롯해, 일본 다이쇼대학의 사이또 다디시 명예교수, 불교연구소 소장대리 다다고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발굴조사의 완료는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3만여㎡나 달하는 방대한 면적의 도량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내는 일이 남았기 때문인데, 발굴 당시부터 영통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원형 복원작업에도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일단 필요했던 것은 복원사업을 원만히 이끌어나갈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었는데, 지도부의 전폭적인 관심 덕분인지 ‘영통사복원추진위원회’라는 명으로 만들어진 구성원들은 북을 대표할 만한 탄탄한 인력들로 짜여졌다.
차후 대한불교 천태종과도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게 되는 영통사복원추진위원회는 북측 최대의 종교단체인 조선불교도연맹과 우리의 문화재청과 같은 업무를 총괄하는 문화보존지도국, 그리고 조선경제협력위원회로 구성되었다.
특히 조선경제협력위원회는 언뜻 보아서는 영통사의 복원과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이는 단체이지만, 사실 북한 내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곳으로서, 수월하게 복원작업을 실시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영통사복원추진위원회에 조선경제협력위원회가 가담을 하게 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통사복원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알게 하는 일면이기도 했다.
영통사터 발굴조사가 시작되고 활발히 작업이 이뤄진 것은 1997년에서 1999년.
당시 우리는 IMF로 인해 큰 경제적 혼란을 겪을 때였다. 청년실업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가정이건 사회건 흔들리는 경제로 인해 견디고 조여 매야하는 어려움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1995년에서 1999년 사이 북한은 고난의 행군시대라 하여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었다. 곳곳에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그 상태가 심각했고, 이는 한민족인 우리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형국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IMF극복을 위해 긴축제정을 실시하고, 사회 전반에서 경기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처럼, 북측도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필요했다. 실질적인 구호사업에 눈을 돌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인민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민족 사업을 펼쳐내는 것도 고난을 극복하는 하나의 길이었다.
북측에게 미래 발전을 위해 새로운 거점이 될 수 있는 개성 영통사 복원.
완벽하게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복원에 대한 의지 또한 팽배했지만 문제는 역시 자금이었다. 영통사는 조그만 경당 몇 개로 구성된 작은 절이 아니었다. 그 규모만도 대단했고, 옛 고려가 자랑했던 영통사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려면 너무나 큰 경제적 요건이 갖춰져야 했는데, 거리에 아사자들이 속출하는 북한의 현실에선 바닥을 다지고, 벽을 세우고, 기와를 얹고 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고되고 힘겨운 고행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영통사의 복원 계획은 한 해를 넘기고 새 천년을 맞이하게 된다.
모든 이들이 그 동안의 시름을 걷어내고 새 시대 새로운 도약을 꿈꿨던 2000년.
그 어느 날 대한불교 천태종으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 갑작스런 전화 한통은 앞으로 5년 간 매우 질긴 인연의 서막이 된다.
당시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재일교포 최준씨였는데,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온 이야기는 다름 아닌 개성에 위치한 영통사에 관한 것이었다. 영통사는 한국 천태종을 개창하신 의천대각국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인데, 참으로 오랜만에 들려오는 영통사에 관한 소식에 천태종단은 기대와 긴장을 감싸 안게 된다.
전화 연락이 있은 며칠 후, 재일교포 최준과 김수식씨가 전운덕 총무원장스님이 계신 구인사로 직접 찾아왔다. 그들의 손엔 영통사 발굴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자료가 들려있었다.
영통사터 발굴 작업에 참여한 다이쇼대학은 일본 천태종과 깊은 관련이 있는 대학으로, 당시 일본 천태종 종무청의 미시요카 요코 총장이 전운덕 총무원장님께 이 자료들을 전달하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북한의 실정이 어려운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그런 와중에도 천태종의 성지나 다름없는 개성 영통사를 복원하려 든다는 것은 고마우면서도 천태종에서 쉽게 관심을 져버릴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영통사터 첫방문>
그러나 복원지원에 대한 연락조차 북측과 직접적으로 하지 못하고,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지원을 문서화 할 수는 없었다.
전운덕 총무원장님께서는 영통사의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만 진다면, 많은 신도들이 한국 천태종의 구심점이 되는 영통사를 성지 순례할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결과를 전제로, 복원지원을 구두로 합의하신다.
그리고 첫 단추로 남측 천태종단에서 개성 영통사터를 직접 방문하는 것을 제시하셨다.
한국 천태종의 옛 자취가 어떻게 남아있으며, 그 복원 현장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앞으로의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대한불교 천태종의 호의적인 관심에 북측도 쾌히 영통사터 방문을 찬성했고, 영통사로 향하는 첫 번째 발걸음은 2000년 새로운 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우선 천태종 내부에선 종단회의를 거쳐 영통사를 방문할 방북조사단이 꾸려지게 되는데, 박덕수 스님을 대표로하여 13명의 스님께서 현지답사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애국불교의 실천 일환으로 통일에 대한 많은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사실이나 직접적으로 개성 땅을 밟게 되는 날이 오다니, 무척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개성에 이르는 길은 길고도 험했다. 북측으로 직접 전화 한통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현실을 직시해 본다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영통사를 찾기 위해선 우선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에서 평양으로 그리고 다시 개성으로 이동해야했다.
서울과 개성은 눈대중으로 그 거리를 짐작해 봐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그러나 당시 천태종단은 제 3국을 통해서만 전화연락과 서신 교환이 가능했고, 걸어서라도 곧 도착할 수 있을 거리를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가르며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가까우면서도 너무나 먼 현실을 눈앞에 남겨 놓고 있었다.
당시 개성 영통사를 처음 찾아가는 길에 13명의 스님들께서는 앞으로 북측과 영통사 복원을 위해 어떠한 약속과 실행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나로 이어진 한반도 길을 남의 나라로 돌고 돌아가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신다.
하지만 첫 번째 방북은 어쩔 수 없이 북경을 거쳐 긴 여정을 하게 되고, 개성 땅에 도착한 13명의 방북조사단은 영통사터로 향하는 짧은 거리만 남겨놓고 큰 감회에 젖는다.
중생을 구제하고 이 땅에 천태종을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의천대각국사는 고려의 옛 땅, 지금 남에서 온 13명의 스님들이 서 있는 이곳을 수 백 번 오가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북측 간부들의 안내로 개성에서 차를 타고 영통사로 향하던 길. 북한 제 2의 도시인 개성은 시간의 흐름이 없는 도시 같았다. 개성시내 중심을 가르는 가장 넓은 신작로엔 자동차 한 대 오가지 않았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드물었다. 도시 전체를 감싸는 짙은 회색빛 건물 곳곳엔 붉은 외침이 그려져 있었고, 우리와 너무도 다른 모습들에 씁쓰레한 울렁임이 몰려왔다.
낯선 개성시내를 빠져나와 십분 남짓 달려가니 오관산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접어들었다. 뒤틀린 창자 모양으로 굽이친 길 옆으로 바다인지 호수인지 분간할 수 없는 드넓은 송도호가 펼쳐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송도호의 절경에 영통사의 모습이 더욱 궁금해졌고, 굽이굽이 흐르던 비포장도로가 끝나갈 무렵, 스님들은 차에서 내려졌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남쪽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관산의 수려한 자태가 위풍당당하게 병풍을 치고 둘러서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고요하면서도 깊은 산세를 품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기품 있는 천태종의 성지 같았다.
다시 차를 타고 30여 분을 달리니, 드디어 영통사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폐사의 이유조차 알 수 없이 조용한 암흑기를 맞았던 영통사. 종단의 시작을 알렸던 유서의 장소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당시 현장을 찾았던 스님들에게 그 감회는 평생가도 잊을 수 없는 뜨거운 용광로 같았다.
하지만 양 발을 내딛고 있는 것이 송구할 정도로 안타까운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오관산을 보며 내던졌던 감탄사가 긴 한숨이 되어 되돌아왔다. 천태종단의 최대 성지라 할 수 있는 이곳이 앙상한 모습으로 스님들을 맞이했기 때문인데, 외로이 서있는 5층 석탑만이 이곳이 옛 고려 때 불법이 흘러넘쳤던 도량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과거 의천대각국사께서 부처님의 뜻을 이어받아 불심을 세상에 알린 이곳이 황량한 벌판으로 변하여 외롭게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이 불사를 복원하는 데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있어도 천태종단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의지가 다져졌다. 더 이상 이 고귀한 땅을 초라하게 방치해둘 순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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