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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복원 이야기 - 베이징에서 만난 남과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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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28 09:27 조회1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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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베이징에서 북측관계자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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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종의 과거가 고스란히 묻혀있는 영통사터를 발굴 조사하여, 도량의 크기를 살피고, 복원을 향한 청사진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릴 자제들이 부족하여 복원을 중단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천태종 신앙의 근원지를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암흑과 혹한에 방치해 둔 것만으로도 목이 메여오는 일인데, 뒤늦게라도 어렵게 다시 찾은 흔적은 꼭 원형 그대로 복원이 되어야하는 것이었다.



첫 방북답사 후 천태종단의 스님들은 영통사 복원에 관한 지원을 일사천리로 진행할 준비를 끝내셨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영통사는 의천 대각국사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통사의 절 복원에 앞서 이 일은 북측을 상대해야하는 첨예한 문제였다.
마음이 따른다하여 무조건적인 배려만 행할 수도 없는 것이며, 마음에 맞지 않는다하여 매몰차게 등을 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북측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에 대한 회의를 하기로 결정했다.
영통사 복원에 필요한 북한 영통사 복원추진위원회의 요구는 스님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우리 스님들의 생각은 도량을 세우는데 필요한 건축자재를 직접 지원하고자 했는데, 북측의 요구는 현금 지원이었다. 그리고 현금 지원에 대한 요구는 어떠한 설득에도 굽힘이 없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북측이 요구하는 현금의 지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원의 취지가 천태의 성지를 복원하는 아주 의미 있는 일이라 하지만, 북측의 속내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었고, 그들이 요구한 수십억 원의 돈이 온전히 영통사의 복원에 쓰이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천태종단에서는 현금의 지원은 절대불가 함을 북측에 알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은 영통사 복원에 필요한 자금을 직접적으로 대한불교 천태종에서 도와주길 원했다.
이제 막 첫 걸음을 떼려하고 있는데, 이 발걸음부터 뒤엉키게 되니 종단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져갔고, 결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현금으로 영통사 복원을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북측에 통보했다.



종단 차원에서야 그 아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철저한 이념대립 구도를 이어가고 있는 남과 북의 정세에선 무엇 하나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13명의 스님이 처음으로 개성 땅을 밟으시고 영통사의 터를 참관한 중요한 사건만 남겨놓고, 영통사 복원지원에 대한 이야기는 뒤편에 묻어두게 된다.



이렇게 단절된 남과 북의 불심은 꼬박 삼년 동안 기나긴 겨울나기를 한다. 남측 스님들은 북의 영통사 복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그 소식을 알 수 없었고, 의견이 통하지 않아 소통의 공간을 갖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할 뿐이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내진 않았지만, 잠시나마 북측과 영통사의 복원을 문제로 의견을 주고받았던 그 시간이 다시 되돌아 오길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은 3년 만에 북측의 연락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역시 제 3국을 통한 연락이었는데, 일본이 아닌 호주가 중간 지점이 되었고, 호주에 거주하고 있는 코스트 그룹 천용수 회장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주었다.
너무나 먼 거리를 우회하여 소식을 받아 들었지만, 3년 만에 다시 이어진 북측과의 소통인데 호주가 대수였겠는가...
일단 베이징에서 남과 북의 대표단이 영통사 복원을 놓고 다시 한번 이야기 해보기로 결론짓고, 베이징에서의 1차 만남을 준비했다. 이번 베이징 방문의 대표는 사회부장이신 무원스님이 맡게 된다.



‘우리 천태종의 성지나 다름없는 영통사는 과연 어느 정도 복원이 되었을까?
이번엔 북측에서 어떠한 지원을 요구할 것인가?’
베이징으로 향하는 무원스님의 마음엔 이 두 가지뿐이었다.
베이징 시내에 위치한 한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영통사복원위원회의 김성철 부장과 최경철 과장의 모습이 보였다.
김성철 부장이 전하는 이야기기에 무원스님은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그간 북한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영통사 복원에 관한 진행 사항을 명확하게 알 수 없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던 3년의 시간동안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어렵게나마 불사복원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기둥을 세우고 벽면을 발라놓은 상태라 했다.

사실 1차 접촉에서 일이 잘 성사되지 않아 아쉬움이 컸고, 어렵게 찾은 천태의 숨결이 다시 매장되는 것이 아닌가 큰 걱정을 했었는데, 어려운 여건에서도 영통사 복원을 위해 그간 애를 썼다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북측에서 여러 건축자재들이 충분하지 못함에도 그간 복원사업을 지속해왔지만, 더 이상 완성을 향한 마라톤을 진행할 수 없어, 다시 한번 남측 천태종에 도움을 청한다고 했다.
그리고 북한 영통사복원위원회가 요구하는 지원은 현금이 아닌 물자 지원이었다. 특히 기와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다. 몸통까지 완성된 불사에 도저히 기와를 얹을 여건이 안 되니 이번엔 꼭 남측 천태종이 함께 해달라는 것이었다.



일단 무원스님은 북측이 요구하는 사항을 자세히 듣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곧바로 전운덕 총무원장스님의 주재 하에 종단회의가 열리게 된다.
본래 북에서 요구했던 현금지원이 아니라면 종단차원에서 개성 영통사 복원에 물자를 지원하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생각을 해둔 상태여서, 오래 고민할 것이 없었다.
물론 일각에서는 북에 일방적으로 지원을 하는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종단에서 북측에 준만큼 꼭 무언가를 되돌려 받으려는 이해타산이 아닌, 지금은 천태종의 성지를 찾고 불심으로 통일을 기원하는 취지를 깊이 되새겨야 할 때였다.



천태종단의 대표로 다시 베이징을 찾은 무원스님은 종단회의에서 내린 결론을 중심으로 기와를 지원해주겠다는 약정에 합의를 한다. 그리고 북측 대표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머금어지는 것을 지켜볼 시간도 없이 곧바로 다시 서울로 돌아오신다.
기와지원이 확정된 이상 서둘러야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북으로 보낼 기와 10만장을 신속히 제작하도록 수원의 한 기와공장에 연락하고, 대북사업에 필요한 업무를 맡아줄 조직을 구성해야했다. 이때 생겨난 것이 나누며 하나되기 운동본부이다.

천태종단의 베이징으로 향하는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기와주문과 동시에 다시 한번 베이징에서 영통사복원위원회 담당자를 만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정확한 지원 날짜와 지원 방법과 같은 세부 사항의 조율하는 일이었다.
첫 번째 지원 날짜를 2003년 10월 27일 즈음으로 정하는 것은 양측이 어려움 없이 합의를 하였으나, 서로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던 부분은 다름 아닌 기와를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 였다.
북측에서는 인천항을 출발하여 수로로 기와를 옮겨와 남포항에 내려놓은 후 다시 수로를 통해 인천으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




무원4.jpg



<약정서에 서명하는 무원스님>



하지만 종단에서는 절대 그런 방법으로 기와를 지원할 수 없었다. 육로를 통해 개성에 가야만 했다.
기와같이 깨지기 쉬운 자재를 트럭에 싣고 인천으로 옮긴 후 다시 배에 싣고, 그것을 또다시 트럭으로 옮겨 영통사까지 이동시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남아나는 기와장이 하나도 없을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남과 북을 하나로 연결하는 육로가 있는데, 굳이 바다를 건너 북에 갈 필요 또한 없었다.
한민족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서로 긴밀한 대화도 어렵고 이동도 어려워, 중국이며 일본이며 호주며 멀리멀리 우회하여 만나는 것도 비통한데, 멀쩡한 육로를 두고 바닷길로 개성을 오가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기와의 운임방법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지원 날짜만을 확정한 후 베이징에서의 만남은 끝이 났다. 그리고 며칠 후 북측으로부터 따뜻한 팩스가 한 장 들어왔다. 물론 호주를 거쳐서 들어온 연락이었다.
북측 최고 지도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측의 천태종만은 영통사 복원자재를 가지고 경의선 육로를 통해 개성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했다는 내용이었다.



한 번의 기와지원을 위해 기다린 시간만 3년이 넘으며, 호주를 통해 주고 받은 서신만 수십 장이다. 그리고 베이징에서의 극적인 만남 또한 3번이나 이루어진 후에야 드디어 남과 북이 맞잡은 영통사 복원 사업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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