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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복원 이야기- 영통사는 어떤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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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28 10:14 조회1,6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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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대각국사에 의해 개창된 한국 천태종이 조선조의 억불정책으로 인해 긴 어둠 속을 걷다가 새로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은 근 500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지하 깊숙이 부처님의 말씀을 이어왔던 시간들... 참으로 애통하고 애잔한 시간이었다.
천태의 뜻과 정신은 강한 비바람과 어두운 그늘을 끌어안고 세월의 흐름을 지켜 봐야했다. 그리고 의천 대각국사께서 몸담고 열반에 드셨던 영통사 역시 고된 역경의 시간을 이겨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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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는 개성시 외곽에서 약 8㎞ 정도 떨어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오관산(五冠山)에 자리 잡고 있다. 오관산 기슭에서 가장 풍치 좋은 곳에 자리한 영통사는 그 경관이 어찌나 수려한지, 영통사의 아름다운 산천경계에 대해 옛 문헌들에서도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산수의 수려함은 송경(개성)에서 으뜸이다”
<고려사>권 제 56지 제 10지리



“영통사는 오관산 아래에 있는데 그 골짜기가 깊고 멀다. 주위는 산으로 둘러막히고 시내물이 감돌아 흐른다. 수림은 울창하다. 그 서루(서쪽 누각)의 경개는 송도에서 제일이다”
<신중동국여지승람>권 지 12 장단 절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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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가 자리한 영통골은 본래 큰 골짜기라는 뜻의 ‘마하갑’이라 불리었다. 불교색이 무척 짙은 이 마하갑이라는 이름은 다름 아닌 고려태조의 조상인 왕씨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붙여진 것이다. 왕씨 조상 가운데 보육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보육은 불도를 닦고 마하갑에 나무 암자를 지었다. 그리고 암자 인근을 마하갑이라 이름 붙였다.
보육의 아들이 작재건인데, 작재건이 바로 태조왕건의 할아버지가 된다. 그러니 예부터 마하갑이라 불리었던 영통골은 고려왕씨 조상들의 발상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렇듯 유서 깊은 영통골에 919년 태조 왕건은 직접 절을 하나 세운다. 그리고 이름을 승복원이라 짓는데,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인 복육의 뜻을 받들기 위함이었다.
이 승복원이 나중에 영통사라는 이름으로 고쳐진다.



영통사는 창건과 동시에 왕의 크나큰 외호를 받으며 커나갔는데, 고려시대의 세조, 태조, 문종, 인종, 명종 등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국가적인 사찰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11세기 들어 영통사는 천태종과 고려불교를 아우르는 매우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의천대각국사께서 이곳 영통사에서 1065년 경덕국사를 따라 입산하여 불학의 첫발을 내딛었고, 교리를 터득하고, 천태종을 개창하셨으며, 1101년 입적하여 묻힌 곳도 이곳 영통사이다.



국청사가 천태종을 탄생시킨 제 1의 성지라면, 영통사는 이 땅에 천태종의 뿌리를 심은 의천 대각국사의 불심이 시작되고 끝을 맺은 사찰이다.
현재 북에서도 의천 대각국사의 1차 장지인 묘실 터와 2차 장지인 부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국사께서 처음으로 승려생활을 시작한 사적이 깃들어 있는 영통사를 명실 공히 한국 천태종의 성지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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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족사에서 첫 통일국가인 고려.
고려는 왕건이 918년 나라를 세운 이래 불교를 국교로 삼고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불교문화를 발달시켰다. 국가를 설립한 다음해인 919년에만도 법왕사, 왕륜사, 자륜사, 보응사 등 무려 10개의 절을 지었으며, 왕건이 재위한 918~943년 동안 고려 전체에 500여 개의 사찰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영통사는 규모로나 승려의 수로나 고려를 대표했고, 특히 고려 왕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개화 발전하였다.



그러나 고려를 대표하고 조선조를 이어 현재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으면 좋으련만, 의천 대각국사의 행적이 묻어있는 영통사는 5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묻혀버리게 된다.
영통사에 관한 창건 기록은 다소 남아있는 편이지만, 폐사에 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영통사에 관한 제일 이른 기록인 <고려사>를 보면
“신묘일에 왕(정조 2년)이 어명을 내려 4명의 아들을 가진 자는 그 가운데 1명을 영통사, 승법사, 보원사, 동화사 등의 계단에 중으로 보내어 자기가 배운 불경과 계율을 시험 치게 하였다”라고 나와 있다.
이 밖에도 <중경지>, <송도유람기>, <송도고적>, <개성군면지>등에서 의천 대각국사의 경력, 영통사의 자연환경과 경치, 영통사를 찾아왔던 고려왕들에 대한 이야기와 존재시기와 폐사 이후의 영통사 상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단편적이지만 영통사와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통사의 폐사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몇 개의 문헌을 통해서 소실 시기만을 예측할 뿐인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1530년에 편찬된 <신중동국여지승람>에서 영통사의 아름다운 경치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1671년에 쓴 <송도유람기>엔 저자인 김창협이 영통사에 갔을 땐 이미 절이 불에 타 주요한 건물은 모두 형태를 감추었고, 12~13동의 부속건물과 뜨락에 돌탑 3기, 문밖에 의천의 비가 서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기록을 대표로 하여 대략 영통사는 17세기 이전에 불타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는데, 두 기록의 발행연도가 100여 년이나 차이가 나 폐사시기를 대략적으로 밖에 추정할 수 없으며, 소실 이유에 대해서도 화재에 의해 전소된 것이 직접적인 이유인지 는 명확히 알 수 없다.



1997년 화창한 가을, 북측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일본 다이쇼대학의 연구진들이 발을 내딛은 곳은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벌판이었다.
허나 저 멀리 당간지주가 웅장하게 서있고, 오관산의 정기를 받아든 땅 곳곳에는 장대한 무언가가 자리했었으리라 기대할 수 있는 흔적들이 산재돼 있었다.
불교를 꽃 피울 수 없었던 조선왕조 500년을 지나, 일제 식민, 한국전쟁 등 한번 그늘에 잠긴 영통사는 극심히 몰아닥친 여름 홍수로 인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오랜만에 고려 명승들이 감탄과 탄복을 했던 오관산의 푸른 경치와 회합을 갖은 것이다.



그동안 여러 사회상과 정치상이 맞물려 오랫동안 관심 밖으로 밀려있던 영통사.
영통사는 고려 천태종이 시작된 곳이자, 많은 학승들이 천태종의 교리를 알리기 위해 땀 흘려 노력했던 곳이므로, 뒤 늦게라도 옛 모습을 되살려 그 명맥을 잇고자하는 깊은 깨달음으로 복원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영통사 관련 시】

영통사에서
이규보


오솔길 구불구불 산중턱에 닿았으니
절간이 어데냐고 물어서 무엇하랴
산속에서 들려오는 맑은 시내물소리에
인간세상 백가지 시비 모조리 깨어지네






영통사에서
김구용


더위를 피하여 산중에서 묵었더니
시원한 기운 돌아 흥취가 새롭네
맑은 시내가에 정자가 서 있고
이끼 덮인 오솔길은 속세를 벗어났네



바위에 걸터앉아 산새소리 들으며
지팽이 짚고 있는 이 몸이 부끄럽네
흰 구름 떠도는 저기 저 골 안에
신선들 있을까봐 이 마음 두렵구나






영통사에서
변계량


궁벽한 곳이라 속세생각 그치고
다락이 높아서 더위도 물러갔나
새들은 풍경아래 감돌아 우짖는데
저녁 종 울리자 중들이 돌아오네



바위 돌 옮겨 서니 소매아래 구름일고
소나무 바라보는데 이슬에 옷이 젖네
가을날 서리 맞아 산과일 익을 무렵
다시 이곳 절간의 문을 두드려라






영통사에서
석월창
숲 속에서 구불구불 샘물 흘러나오고
집앞에는 노송나무 짙은 그늘 던지는데
가을되니 골 안은 한결 더 쓸쓸하고
령 너머 구름 걷히니 골 안 더욱 깊어지네



이끼 덮인 비돌에는 옛 필적 력력한데
흰 벽에는 새로 지은 시 줄이 적혀있네
이윽토록 앉았으니 정신은 맑아지고
풍경소리 들리자 밤이 깊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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