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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복원이야기-개성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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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29 13:35 조회9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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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불교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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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사 우물)

조선 중기의 한 기록에는 유명한 사찰만도 성내에 300곳이 있었고, 현재 절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도 100개가 넘는다고 했다. 태조 왕건이 고려 건국 이후 궁궐 주변과 송악산 기슭에 25개의 절을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일제 말 개성을 답사하고 <송도의 고적>을 썼던 고유섭 박사에 따르면, 황성과 궁성 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찰만도 법왕사지, 광명사지, 일월사지, 흥국사지, 귀산사지, 안화사지, 왕륜사지 등이 있으며, 개성성 일대를 정밀하게 조사를 할 경우 더 많은 수의 사찰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성의 건축석조예술의 우수성 역시 불교와 관련된 유적·유물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흥왕사지는 1055년부터 1067년까지 12년 간 건설한 절로서 2천8백 칸이 넘는 크고 화려한 흔적을 고스란직하고 있다.
1018년 고려 8대왕 현종이 선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현화사와 안화사 역시 아름다운 건축미로 사람들을 황홀하게 하였다고 한다. 개성역사박물관에 소장된 현화사 7층 석탑은 고려 석탑의 전형적인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일제 때 이 탑을 약탈해가려고 해체하여 개성역까지 싣고 갔다가 개성 사람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본래의 위치에 가져다 세웠다고 한다.
고려 16대왕 예종 때 세운 연복사에는 2백여 척이나 되는 석탑이 있었고, 우리나라의 5대 명종의 하나인 연복사 종이 달려 있었다. 연복사는 1563년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연복사 종은 현존해 당시의 예술혼과 불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개성 덕암리에 있던 개국사는 고려의 10대 사찰의 하나로 그 규모와 화려함이 대단했다. 현재 개국사가 세워졌던 터에는 석등과 7층탑 등이 남아있다.


흥국사 석탑도 고려 초기의 석조 역사 유물의 하나이다. 이 석탑은 1021년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던 구주성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강감찬 장군의 제안에 따라 고려 왕궁 동남쪽 흥국사 터에 건립했다.
화장사에 현존한 ‘지공정혜령조지탑’ 역시 큼직하게 두 겹으로 된 연꽃잎을 새긴 조각솜씨에서 당시의 기예를 엿보게 한다.
또한 개성시 부산동엔 고려시대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과 북한의 국보와 보물을 전시하고 있는 개성역사박물관이 있다. 이외에도 개성에는 목청전, 경덕궁, 개국사 석등, 대응산성관, 관음사, 안화사, 화랑사 부도, 오룡사의 법경대사비, 팔좌등비, 관덕정, 호정, 구군정 등도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화장사 사리탑(북한 보물 34호·14세기). 팔각 기단석 위에 종 모양을 한 사리탑은 빼어난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흥국사지와 흥국사 탑. 1021년에 세워진 흥국사 탑은 북한 보물 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룡사 법경대사비(944년)
관음사 (고려 중기·현존) 왕과 관료들의 시회·연회 장소로 많이 애용된 곳. 인근에 박연폭포가 있다.
◇안화사 (1018년·현존) 고려 현종이 죽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
◇법왕사지 (920년) 팔관회 등 국가 차원의 불교행사를 주관했다.
◇연복사지 (고려 예종) 1563년에 모든 전각이 불탔다.
◇국청사지 (1303년) 나성 서쪽 밖에 위치 교통과 국방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화장사지 (1370년) 지공 스님의 부도인 ‘지공정혜령조지탑’이 있다.
◇흥왕사지 (1055년) 고려 초기의 대표 사찰로 2천 800 칸이 넘는 규모였다.
◇개국사지 (고려 초) 고려의 10대 사찰 중의 하나. 현재 개성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석등이 유명하다.
◇왕륜사지 (920년) 고려 건국 초 궁궐이 정비되지 않아 이곳에서 국사를 논했다.
◇불일사지 (951년) 고려 왕의 행궁지로 추정되고 있으며, 불일사 5층탑(북한 국보 35호)이 유명하다.

<개성의 왕궁,그밖의 유적지>

역사 고도에 왕궁과 왕릉이 빠질 수 없다. 개성 송악동에 있는 고려 왕궁 만월대. 웅장했던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돌계단과 건물 주춧돌만 쓸쓸히 남아 있다. 왕궁터는 약 38만평. 만월대의 모형은 개성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만월대 터엔 고려 천문관측기구인 첨성대가 있다. 이 첨성대는 그 자체가 천문관측기구였던 것이 아니라 관측기구를 올려놓는 받침대 역할을 한 보조기구였다.
개풍군 해선리엔 태조 왕건릉과 공민왕릉이 있다. 공민왕릉은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 인덕왕후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충절의 상징인 선죽교와 표충비, 그리고 서경덕, 황진이와 함께 송도 3절의 하나인 박연폭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박연폭포는 개풍군에 있으며 높이는 약 20미터. 박연폭포 용바위엔 황진이가 머리채로 썼다고 하는 글씨를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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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태조 왕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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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화사 우물)                                         (개성 남대문)                                   (선죽교)


  ◇첨성대(고려초) 천문관측기구를 올려놓았던 곳
◇만월대 (919년) 고려왕조 전기간에 걸쳐 왕궁이 자리잡고 있던 유적.
◇황성·궁성 (919년) 고려 왕궁은 황성·궁성으로 나뉘는데, 궁성의 넓이는 39만 평방미터.
◇성균관 (1089년) 고려 최고의 교육시설. 대성전과 명륜당 등 20여 채의 건물이 있었다.
◇선죽교 (1216년) 당시 이름은 선지교. 정몽주의 피살 이후 선죽교로 부르게 됐다.
◇남대문 (고려 초) 개성성 내성의 정남문. 문루에 연복사 종이 걸려 있다.
◇왕건릉 (고려초) 태조 왕건의 유언에 따라 소박하게 지어졌으나, 해방 이후 재건됨.
◇공민왕릉 (1365년) 석조 조각이 우수한, 고려 말 왕릉 형식을 대표하는 고분.
◇개성성 (919년) 고려의 수도성으로 나성(羅城)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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