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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年 | 금강신문 기획특집 - 개성 영통사, 금강산 신계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2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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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7월부터 연재해 온 ‘스러졌다 살아 난 옛 절’ 코너를 마무리한다. 1700년이란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의 산물이 이 땅 곳곳에 많이 남아있지만, 그동안 남북 분단이라는 한반도 현실 탓에 남쪽 지역의 사찰만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지면을 빌어 남과 북이 공동으로 복원한 유서 깊은 사찰 2곳을 소개한다.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천태종 開山 도량…2005년 남북 공동복원
고려시대 도읍으로 500년 영화를 누린 개성. 서울과 자동차로 불과 1시간 남짓의 지근거리에 자리하고 있지만, 지금은 남북분단으로 자유로운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다. 이곳 개성 도심에서 약 8㎞ 떨어진 곳에 한국 천태종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찰, 영통사(靈通寺)가 있다.

영통사는 중국 천태종을 들여와 한국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1055~1101) 스님이 11살 때 경덕 국사를 은사로 출가했고, 중국 유학 이후 35년간 수행한 도량이다. 가히 한국 천태종의 종찰(宗刹)이라 부를 만하다.

918년에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이 이듬해 증조부가 머물던 암자를 숭복원이라 이름 짓고 크게 확장한 것이 영통사의 시초라 전해진다. 이후 고려 세조(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륭), 태조, 문종, 인종, 명종 등의 초상화를 걸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등 왕실의 원찰 역할을 수행하며 크게 번성했다. 일각에서는 고려 현종 때인 1027년 건립 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영통사는 조선 중기까지 번성하다 16세기에 소실됐다. 이는 1530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영통사가 소개됐지만, 1671년 김창협이 쓴 《송도유람기》에는 ‘영통사 주요 건물들이 불탔다’고 나오는 것 등에 미루어 병자호란(1636. 12~1637. 1) 또는 정묘호란(1627년)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유추된다. 《송도유람기》에는 당시 상황을 ‘절은 이미 불타고 12~13동의 부속건물과 돌탑 3기, 문밖에 의천의 비가 서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소실된 후 4세기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란 등을 굽어보던 영통사가 복원된 것은 2005년. 1999년부터 2년여의 발굴조사를 거쳐 2002년부터 한국 천태종과 북한 조선경제협력위원회가 본격적으로 공동복원사업을 진행했다. 3년여의 불사 끝에 6만㎡(약 2만평) 부지에 보광원ㆍ중각원ㆍ승복원 등 총 29개 전각이 다시 들어섰다. 대각국사가 영통사에 주석할 당시 왕실의 넉넉한 지원 덕에 절앞에서 죽을 끓이고, 밥을 지어 헐벗는 개성 백성들을 돌봤다는 영통사의 위엄이 되살아난 것이다.
 

영통사 복원을 위해 건설중장비 7대를 비롯 기와 46만여 장, 단청안료 3000세트(약 20톤), 조경용 묘목 1만 그루 등 약 40억원의 자재가 16차례에 걸쳐 지원됐다. 지원물품들은 육로로 운반되면서 남북분단사의 새 장을 열었다.

2005년 10월 31일 스님과 불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불ㆍ낙성식이 열렸으며, 2007년 6월 세 차례 대규모 성지순례가 진행됐다. 또 우란분절 법회와 대각국사 열반 다례재 등이 이곳에서 남북합동으로 열렸다.

영통사에 있는 불교유적으로는 대각국사비(大覺國師碑. 북한보물 제36호), 당간지주(북한보물 제37호), 오층석탑(북한국보 제37호) 등이 전해진다. 전체 높이 4.32m(비신의 높이는 3.06m)에 달하는 대각국사비는 의천 스님의 행적을 후대에 상세히 전하고 있다.

천안함 사태 등을 이유로 관계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에 대해 영통사는 ‘우리가 남이 아닌 하나’임을 묵묵히 전해주고 있다.
 

 


 

/금강산 신계사/ 효봉·석두 등 배출한 고찰… 폐사 53년만에 복원

2004년 착공해 4년 간 불사 진행
대웅전ㆍ극락전 등 14개 전각 낙성


남북 분단으로 자유로이 드나들 수 없는 땅이 된 금강산에는 예부터 이름난 4대 사찰이 있다. 유점사(楡岾寺)ㆍ장안사(長安寺)ㆍ표훈사(表訓寺) 그리고 외금강 온정리(溫井里)에서 옥류동(玉流洞)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신계사(神溪寺)다.

근ㆍ현대의 고승인 석두(石頭)ㆍ효봉(曉峰)ㆍ한암(寒巖) 스님 등을 배출한 이름난 도량이다. 주위가 온통 울창한 노송으로 둘러싸여 있고, 문필봉ㆍ관음연봉ㆍ세존봉ㆍ집선봉 등 외금강의 절경을 사방에 거느리고 있어 이름난 기도도량으로도 꼽힌다.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5호로 지정돼 있다.

남경 지환 스님이 1825년에 지은 ‘금강산 신계사사적’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 5년(519)에 보운(普雲) 대사가 창건했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신라의 신(新) 자를 따서 신계사(新溪寺)였다. 이후 보운대사는 신계사 계곡에 물고기떼가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부처님의 도량은 가장 청정한 법계인데, 어찌 물고기가 있어 냄새가 진동을 하는가’라고 생각하고 주문으로 방편을 써서 고기떼를 바다로 몰아 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신계사의 신(新) 자가 신(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후 김유신이 진덕여왕 7년(643)에 신계사에서 왕실을 위한 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중건했고, 문무왕 19년(679)에는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과 문무왕 동생 김인문이 왕실에 청을 올려 대웅전을 보수했다.

고려 초에는 광종의 국사였던 탄문 스님이 광종 19년(968)에 사찰을 보수했고, 묘청이 인종 8년 중창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나운(1709~1782)ㆍ대은(1780~1841)ㆍ대응 스님 등이 주석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이밖에 황근중, 정원용, 신재식 등이 불사에 적극 동참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김규복은 1887년 대웅보전 중건부터 수차례에 걸쳐 많은 양의 재물을 보시했으며, 유경화는 1929년 180석에 달하는 토지를 선원에 기부하는 등 재가자들의 후원도 많았다. 하지만 11개의 전각이 있었던 신계사는 한국전쟁으로 모두 소실되고 삼층석탑과 부도, 재가불자들의 공덕비만 남아있었다.

신계사 복원 불사는 1998년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와 북측이 합의해 추진됐지만, 이후 어려움을 겪자 북측에서 현대아산을 통해 조계종에 복원 불사 추진 요청해 본격화 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사가 확인되면서 조계종, 현대 아산, 북한이 공동 추진을 합의하면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2001년 복원을 위한 기원법회에 이어 남북이 합의해 처음으로 신계사와 온정리 부처님오신날 연등달기를 실시했다.

2001년 11월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복원 불사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2002년 5월 5일 복원을 위한 연등법회, 2003년 1차 대웅전 터 시ㆍ발굴조사가 진행됐다. 2003년 1월 당시 총무원장이던 정대 스님과 조불련 박태화위원장, 7월 조계종과 현대아산이 신계사 공동복원 의향서에 합의했다. 2004년 1월에는 조계종과 현대, 3월 당시 총무원장이던 법장 스님과 조불련 박태화위원장이 실행합의서에 서명하고 본격적으로 복원 불사를 시작했다.

이후 2004년 4월 착공식에 이어 6월 복원추진위원회 발족식을 한 뒤, 삼층석탑을 해체하고 발굴조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며 11월 대웅보전을 낙성했다. 2005년에는 만세루ㆍ극락전 상량식을 했고, 대웅보전ㆍ산신각ㆍ만세루ㆍ최승전의 단청불사를 완료했다. 같은해 칠성전, 종각, 나한전, 어실각, 축성전을 완공하고 11월 2차 낙성식을 가진 뒤 2007년 나머지 전각 단청불사 완료, 10월 12일 대웅보전 부처님 점안식과 10월 13일 준공식을 갖고 4년에 걸친 복원불사를 마무리 지었다.

신계사 복원은 불자들의 보시금과 통일부의 남북협력기금을 바탕으로 현대아산의 협조가 큰 힘이 됐다. 복원불사 과정에는 남측의 석탑 복원, 고건축 설계, 도편수 등 목조건축, 발굴조사, 단청, 석축, 현판 글씨, 판각, 불상, 탱화, 창호, 기와공 등 전문가와 북측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과 문화보존지도국 관할의 발굴대, 단청, 설계 등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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